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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 주눅 들다

주눅 들다 洪 海 里 대금이나 하모니카 잘 부는 이 앞에서내 시는 주눅이 들고 만다대금 가락이 나를 날려 버리고하모니카 소리가 시를 날려 버린다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앞에 가도내 시는 맥 못 추고 움츠러들고말 잘하는 친구 앞에 앉으면내 입은 닫히고 만다시 잘 쓰는 시인을 만나면나는 쥐구멍을 찾기 일쑤다가진 것 없어도 갖추갖추 장만해야지겁나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움츠러들지 말자 시들지 말자너를 만나도 그를 만나도일없다 일없다 하자 하면서도! ― 시집 『찰나는 칼날처럼 푸르다』, 놀북, 2026 남의 재주가 좋아 보일 때가 있다. 대금 소리에 내 시가 날아가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앞에서는 괜히 작아진다. 말 잘하는 사..

홍해리 / 미꾸라지, 새를 잡다

미꾸라지, 새를 잡다 洪 海 里 수조의 연잎을 착륙장으로 알았을까잎에 떨어진 미꾸라지 먹이를쪼아먹으려다물에 빠진 어리고 여린 새끼 참새다리를 뻗어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천근만근이 된 작은 몸뚱어리로올려다본 하늘은 너무 높고물은 깊기 천 길이었다바닥인 줄 알았는데 허공이요하늘인 줄 알았는데 물속이었다때늦은 점심이었을까아니면 저녁이었을까아기새 두 날개를 가지런히 모으고다리를 쭉 뻗은 채 이승을 잃었다아니 잊었다"이게 뭐야!" 하고 들여다보다얼른 꺼내 대나무 아래 묻어 주었다새는 노랑어리연과 놀 수 없었다날개는 물갈퀴가 아니라서하늘도 물에 젖어버렸다쓸쓸한 적막이 하늘을 가려버렸다. ― 시집 『찰나는 칼날처럼 푸르다』, 놀북, 2026 하필 먹이를 찾..

박주하 / 종소리

종소리 박주하 딸애가 사준 풍경을책장에 고이 두었다가식구 방문 앞에 걸었다 저녁 무렵뎅그렁, 종소리가 울리고집 안에 번지는 그 향기가 그윽해서마루로 뛰어나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좋았는지머리 희끗한 부처는연신 방문을 드나든다 저녁내 종소리가 울린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집 안에 그윽한 향기가 번진다니, 이 풍경소리 참 좋다. 풍경 하나가 집 안의 저녁을 이토록 환하게 바꿔놓는다. 오래 눈길 주지 못했던 물건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무엇보다도 ‘머리 희끗한 부처’가 연신 방을 드나든다니, 전에 없던 장면이다. 풍경소리는 그렇게 웃음을 부르고 마음을 모은다. 그렇게 집 안이 채워진다.

박주하 / 나뭇잎 하나가

나뭇잎 하나가 박주하 나뭇잎 하나가 날아와 손가락에 앉았다 오래 그리웠던 사람인 양오돌토돌한 잎사귀의 지문을 더듬으며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반갑게 묻고 또 묻던 중인데 간절하게 잡았던 그 잎, 문득 사라지고엄지와 검지가 저희끼리 열심히 비비고 있었다 어느 별에서 낙오된 나의 조각일까 초록의 생엽을 쥐었던 저릿한 꿈이어둠 속에서 허탈하게 앉아 있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잎사귀의 결을 더듬다가 잎은 사라지고, 엄지와 검지만 서로 비빈다. ‘저릿한 꿈’의 기억, ‘어느 별에서 낙오된 나의 조각’은 어디로 갔을까. 사람도 그렇고, 지나간 시간도 그렇다. 붙잡고 싶었던 것일수록 떠난 뒤..

나혜경 / 노숙

노숙 나혜경 밥 주던 길냥이가하필 장마철에 능소화나무 아래에서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제 등으로 비를 막아 어린것들을 지키더니긴 장마 지나자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통통통 뛰던 아이들 어느 날부턴가 세 마리만 보였다어느 날은 한 마리만 보였다이제 그도 없다풀이 죽어 어미 혼자 다닌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제 등으로 비를 막아가며 지켜낸 아이들이 통통통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점점 마음이 가라앉는다. 세 마리에서 한 마리로, 마침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기에 더욱 측은하다. 다만 남겨진 어미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슬픔이 얼마나 많은가. 새끼를 잃은..

나혜경 / 비 오기를 오래 기다린 말씀

비 오기를 오래 기다린 말씀 나혜경 가문 날이 길어지자이웃에서 얻어 심은작약 세 뿌리 중겨우 하나 살았다 그도 잎이 말라가는데어찌 알고 실한 것으로 몇 뿌리대문 앞에 놓고 간다는 말씀 딱 맞게 비 오는 날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가뭄이 길어지면 꽃도 사람도 마른다. 이웃에게 얻어 심은 작약 세 뿌리 중 겨우 하나가 살았는데, 그마저 잎이 말라간다. 애써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럴 때 “어찌 알고” 건네는 마음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마음. 묻지 않고 대문 앞에 놓고 가겠다는 그 마음이 참 곱다. 그 마음에 맞춰 비가 온다. 기다렸다는 듯, 늦지 않았다는 듯. 하늘의 비와 사람의 마음이 나란..

나혜경 / 망종

망종 나혜경 현충일 추념사가검은등뻐꾸기의 네 음절 울음소리가산들바람에 겅중거리는 보리 이삭이어미를 놓친 어린 뱀 한 마리가내가 날 다급하게 부르는 손짓이 하나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와풋 풍경을 이뤄보려는 때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생각해보니 그 계절이 그렇다. 현충일 추념사는 나름대로 엄숙하고 검은등뻐꾸기의 울음은 그렇던가. 네 음절로 홀딱벗고 산들바람에 겅중거리는 보리 이삭이나 넘겨다보던 거기 누가 있었던가. 어미를 놓친 어린 뱀 한 마리에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손짓이 생각해보니 망종의 들판에 한데 놓였는데, 또 생각해보니 ‘풋 풍경’을 이루려는 때라.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풍경에 은근히 끼어들고 싶다.

나기철 / 칠월 한낮

칠월 한낮 나기철 빨리8천 원 목욕8천 원 점심 편의점천5백 원 아이스크림,나오는데 이국 청년천5백 원 컵 짜바게티,8백 원 캔 콜라앉아 천천히 먹는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한낮의 일정이 가격표처럼 짧게 찍힌다. 빨리 먹고 나오는 사람에게 하루는 계산으로 서둘러 지나가는 시간이다. 이국 청년은 천5백 원 컵 짜바게티와 8백 원 캔 콜라를 앞에 놓고 천천히 먹는다. 같은 칠월 한낮, 한 사람은 서둘러 나오고 한 사람은 오래 앉아 있다.

나기철 / 열여덟

열여덟 나기철 클래식 연주 영상비치는성당 앞 골목'까사돌' 가끔여고 때 문학 동인누나가앉아 있다 50년이 훨씬 넘었다 요즘 뜰엔어떤 꽃이 펴?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골목에 ‘까사돌’이 있는지, 누나가 실제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클래식 연주 영상이 비치는 골목에서 문학 동인 누나를 떠올리는 순간, 50년이 훌쩍 넘은 세월도 잠시 가까워진다. “요즘 뜰엔 어떤 꽃이 펴?” 그때의 뜰인지 지금의 뜰인지 알 수 없는 물음. 꽃 소식을 묻다가 문득 열여덟의 안부를 묻는다.

함순례 / 기우杞憂

기우杞憂 함순례 날은 저물고 눈발은 날리는데 마침내 버스가 왔다. 버스엔 늙수그레한 어르신과 단둘뿐. 마을까진 한참인데 어찌 가시려나, 내내 걱정했는데 끙 일어서는 어르신 벌써 힘겹다. 어르신……, 정류장의 전동차에 올라타신다. 눈길을 가르며 달려가신다. 징글벨 멀어지신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마을까지 한참을 가야 할 텐데, 어떻게 가실까, 저 연세에…… 시는 어쩌면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일이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문득 복도에 멈춰 선 옆집 할머니의 전동차가 떠오른다. 한때는 부지런히 길을 나섰을 전동차는 오랫동안 먼지만 쌓고 있다. ..

함순례 / 대왕참나무

대왕참나무 함순례 겨울 끝까지갈잎 떨구지 않던 나무 새순 밀어 나오자손을 펴듯 잎을 놓는다 비움은 결심이 아니라새로움이 자란 힘이구나!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꼭 미련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아서 붙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새순이 밀고 나오자 잎을 놓는 것을 보니 알겠다. 생명을 품고 기다린 날 끝에서 비로소 덜어내는 것은 잃는 일이 아니라, 제 안에서 자라난 새로운 생명을 믿는 일이다. 때를 기다려 새순 같은 시구 한 줄을 몸 밖으로 밀어내는 시인의 마음이 문득 궁금해진다.

함순례 / 하강 연습

하강 연습 함순례 비 그친 아침베란다 난간에 매달린 물방울들 흠도 없이 실수도 없이 완벽한낙하를 위해 숨을 고르는 다이빙 선수 같다 떨어지는 일이야말로한 생의 기술이라는 듯 마침내 놓아야 할 것을 아는투명한 몸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그저 떨어질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물방울은 “흠도 없이 실수도 없이” 내리기 위해 숨을 고른다니. 떨어짐을 추락이 아닌 하나의 완벽한 동작으로 바꾸어 놓는 순간, 물방울은 ‘한 생의 기술’을 아는 존재가 된다. 그 짧은 순간에 깃든 긴장과 고요를 따라가다 보면, 나는 시가 건네는 삶의 비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붙잡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내려놓는 일에..

함순례 / 허기의 방향

허기의 방향 함순례 사람 발소리에도 돌아보지 않는다 무덤가에 고개를 묻고허기를 뜯어 먹는 입 두려움보다 먼저 오는 것이목숨이라는 것을 끝내 허기 쪽으로 몸을기울이는, 고라니 한 생명이 제 목숨을 먹이는 시간 밖으로나는 조용히 걸어나왔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허기를 입력한 내비게이션은 한번 정해진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더구나 목숨을 주소로 적는다면 그 집중력은 절대적이다. 두려움을 압도하는 본능에 온몸을 맡긴 시로 읽는다. 되돌릴 수 없는 ‘허기의 방향’을 목격하고, 이 순간 대체 언어를 떠올리는 짓은 부질없다. 오직 “한 생명이 제 목숨을 먹이는 시간 밖으로” 어쩌지 못하고 걸어 나올 수밖에 ..

이지엽 / 새 ㅡ 송용

새 ㅡ 송용 이지엽 암청색 하늘에 떠 있는 새붉은 달먼 산은 희었다가 연분홍, 노랗다가가까운 산들은 녹색과 짙은 연두와 황토와 회색빛때론 이 비현실이 가장 현실적이다큐비즘 절묘한 색의 배합절망이나 희망은언제나 끝에서반전한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암청색 하늘에 떠 있는 새와 붉은 달, 그리고 멀고 가까운 산의 여러 색채가 눈에 들어오는 모양을 그대로 써본다. 이를테면 글씨로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다. 시를 읽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내가 덧붙이려던 생각이 달아나기도 한다. 그림이 먼저 보여주는 세계를 말로 따라가려다 보면 생각보다 색채가 앞서간다. 눈에 드는 사물이 다르게 채색되는 것은 그림뿐만..

이지엽 / 여자의 마음

여자의 마음 이지엽 안에는 천 개의 바다가 있다먼바다에 풍랑일면 근심 어린 얼굴로어만데 눈 팔지 마라손끝 발끝 단속하고따사한 꽃밭 은실난실 날씨에는목백일홍 짜글한 눈매은목서 향 날리며은적골 아재 왔능교애교 눈짓 재재거리고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겉모습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 깊이와 출렁임을 갖춘 바다는 언제든 표정을 바꿀 것이다. 먼바다 풍랑까지 걱정하고, 마음을 단속하라는 당부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애틋함이 묻었다. 한편 드러내지 않은 여자의 마음을 들키고 마는 그 눈매와 향은 그간 어떻게 단속했을까. 금세 애교 눈짓으로 표정이 달라지는 게 신기하다. 감추려 할수록 오히려 들켜버리는 여자의 ..

윤 효 / 만월

만월 윤 효 사월 초파일에는 반달이 뜬다.절반은 꼭 비워 놓는다.지상에 내걸리는 그 간절한 빛으로온 누리 둥글어질 때까지마저마저채워서밝히라고. 부처님오신날에는하늘도 그렇게 연등을 내건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반달을 바라보며 비워 둔 절반의 의미를 생각한다. “절반은 꼭 비워 놓는다”는 말에 멈춘다. 그 여백에 머물다가 문득 배부른 느낌이 든다. 어떤 말이 들어앉기 전에 이미 채워지는 무엇이 있다. 시를 읽는 사람이 접촉하는 특별한 감각이다. 결핍을 채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모처럼 아내와 저녁을 먹고 들어오다 반달을 만났다. 복도에서 찍은 반달은 점점 부푸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제 서두르지 않고..

윤 효 / 실사구시實事求詩 ㅡ 한상호 시인

실사구시實事求詩 ㅡ 한상호 시인 윤 효 중어중문학을 공부하고 기업에 입사했다.한자문화권 주재원 발령이 났다.성심을 다했다.어릴 적 보고 배운 게 그것뿐이었다.명절마다 그 나라로 부모님을 모셨다.그러하였으므로 퇴직 무렵 시인이 되었다.귀향해서는 산과 바다와 사람의 내력을 채록했다. 강원도 양양에 가면 오늘도 길 위에 선초로의 그 소년을 만날 수 있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대개 한 사람의 이력이 몇 줄 놓이는 것이 시다. 살아온 일을 나열하려는 목적은 아니지만, 그의 생은 토막토막 묻어나기 마련이다.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살아낸 사람의 “그러하였으므로”가 ..

오인태 / 시의 경지

시의 경지 오인태 저, 노인이 지팡이에 기대 가는 것이냐.저, 지팡이가 노인에게 기대 가는 것이냐. 노인은 지팡이가 짚을 곳을이리저리 살피고 지팡이는 노인이 디딜 곳을여기저기 두드려보고 조심조심 길은 멀고뉘엿뉘엿 해는 지고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산다. 문 열고 나설 때 지팡이와 한 몸이다. 집으로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다. 둘이 한 걸음 두 걸음 함께 걷는다. 내 몸에 늘 지팡이가 붙어 있으니, 이런 시를 읽을 때는 주관적인 견해를 삼가는 편이다. 간혹 글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오래 그렇게 살다 보니 “조심조심 길은 멀고/뉘엿뉘엿 해는 지.”는 하루가 어느덧 한..

오인태 / 호박부처

호박부처 오인태 늙어 더 의젓한 생애를 보다늙을수록 유용한 생애를 보다 폭염도 폭우도 꺾지 못한위풍당당한 근육질의 생애를 보다 외면하고 비웃던 세상에육신 공양으로 화답하는 한 생애를 보다 늙어가는 또 한 생이고개 숙여 두 손 모으다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가을이 깊어지면 아내는 호박을 자꾸 얻어온다. 직원 중에 시골살이하는 이가 있는 모양이다. 늙은 호박 몇 덩이씩 쌓은 마루 풍경을 보고 자라서인지 호박이 들어올 때마다 친근하다. 손질할 때 속을 긁어내고 껍질을 도려낸 후 알맞게 잘라주는 것은 내 몫이다.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럽다. 다른 집보다 호박을 일찍 키우려던 할아버지는 씨앗을 심고 함지박 모양..

오성일 / 어쩌면

어쩌면 오성일 시를 좀 현대적으로 써보라고가만있는 나를 건드리다가 유치한 것이 진실하다는 생각이불쑥 들었다 예전 날 파나마에서홍수환이 챔피언 먹었던 그때의 사람 키만 한 트로피와소 혓바닥 같은 벨트! - 『작은詩앗·채송화 제36호, 구름이 나를 구름이라 불렀다』, 고요아침, 2026 현대적으로 쓰는 사람과 유치하게 쓰는 사람이 섞이는 시동네도 재미있을 거로 여긴다. 수준을 논할 일이 아니다. 시의 속성이 그렇다. 골고루 나눠 쓰는 문자로 제 생각을 놓으면 그만이다. 어쩌면 오래된 기억에서 꺼낸 유치한 모양에 감동이 깃들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오른 것이 홍수환이 파나마에서 챔피언이 되었던 때의 기억이다. 트로피와 벨트의 상징이 유치하지만, 진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