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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후유증은

거의 끝난 것 같은데, 보름 지났는데도 더러 꽃이 들어온다.안 그래도 베란다 화분 때문에 답답한데. 이 꽃은 시를 읽은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데요가난한 시를 안아주는 사람에게꽃을 안겨줘야 하는데요, 했더니 “뭔 시인 같은 소립니까?” 한다.하마터면 시인이 될 뻔했다. 사실 꽃에는 관심 없다.전화기로 들어오는 빵, 커피에나 마음을 둔다.나 데리고 커피숍에 갈지는 모르겠으나.

오창렬 / 생일

생일 ​ 오창렬 ​ 그때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생일인 친구로 카톡에 뜬 내게 특수 학교 교사인 그가 자기 학교의 생일 축하 영상을 보내왔을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기타 치고 손뼉 치며 선생님들이 축하 노랠 부르는 영상 속에서 정말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한 아이가 사랑받고 있을 때 학생의 생일 축하에 교사가 총출동하는 낯선 풍경을 한가한 감성 놀이로 일축해 버리려던 나는 무엇에 흔들리며 살았을까요 사랑을 잊은 입술로 학력에만 방점을 찍는 분위기를 어찌하지 못할 때 나는 사랑받는 선생이었을까요 내가 받은 사랑이 사랑이었을까요 학종으로 대학에 가고 판검사가 되거나 의사고시에 합격하면 우리 학생들의 경쟁은 끝나는 것일까요 이기고 ..

오창렬 / 작은 집

작은 집 오창렬 생애를 바쳐 나 집 한 채 지어야겠네 하루 일을 끝내고 그대에게 돌아갈 때 초인종 눌러 따로 집주인의 허락 얻지 않아도 되는 맘 편하게 그대를 소리할 수 있는 집 담은 낮게 허물어 놓고 노래하듯 내 부르면 춤추듯 그대 대답하여 부르고 대답하는 소리 넝쿨장미처럼 넌출거리는 집 저 푸른 초원 위에 지어야겠네 온종일 젖히고 구부리며 풀들이 웃고 마알간 얼굴 꽃으로 피는 그대를 보며 나는 더디 늙을 것이네 초원이 넓어 집은 작아도 좋겠네 작아서 그대와 나 둘만 살다 작아서 이 세상 다음까지 들고 갈 수 있는 집 그렇게 몇 생을 살아 작은 집 닳아지면 그때는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는 집 물이 되고 구름 되어 살 때 흐르고 흘러도 서로의 안이 되는 거대한 집 ..

오창렬 / 옹이

옹이 오창렬 ​ 점심도 한참 지났는데 가슴 한구석이 몽글거린다 누르면 천 원이 기부된다는 버튼 앞에서 마음을 내려다 거두었던 아침 일이 잊히지 않는다 줄기에 박힌 옹이를 본 적 있다 꽃을 피우고 싶던 꿈과 이파리도 피우지 못한 절망이 함부로 뭉개진 상처를 본 적 있다 봄나무가 마음을 보내는 가지마다 노랑으로 분홍으로 또 연두로 세상 푸지게 흐드러지는데 버튼 너머로 흘러가지 못한 마음이 휘돌다 내 가슴 한구석에서 소용돌이쳤던가 흐르는 마음 젖이 되고 꿀도 되어 꽃송이 송이마다 향기도 마알간 봄날 나는 겨우 옹이를 위무하던 목수의 대패질을 떠올렸다 몽글거리던 후회를 어루만져 무늬가 될 무렵 저녁이 와서 헐렁한 내 삶을 조이는 옹이를 꿈꾸었다 ― 시..

오창렬 / 완두콩 까는 저녁

완두콩 까는 저녁 오창렬 초여름이 제철이라는 햇완두콩을 한 망 샀다 꼬투리를 뒤집어 양손으로 잡고 비틀어 주면 초록니 가지런한 완두콩의 싱그러운 미소가 쏟아져 아내와 나는 앞앞이 양푼을 놓고 완두콩의 웃음소리까지 살뜰히 담아가며 완두콩을 깐다 꼬투리는 완두콩의 푸른 집들 작은 집엔 식구가 서넛으로 단출하고 큰 집엔 아홉씩 열씩 대식구가 오보록하여 망째 쏟아놓은 초여름의 식탁 위는 다정으로 복작거리는 포근한 마을이 된다 콜레스테롤과 심장 건강에 좋다고 아내는 완두콩의 유익을 말하지만 우리가 실제 양식으로 삼는 것은 완두콩 가족의 미소와 다정일 터 나는 가족의 얼굴에 번지는 푸른 미소와 단란을 상상하며 완두콩을 깐다 우리에게는 한 이불..

오창렬 / 등

등 오창렬 기다리던 책 출간 소식을 보였더니 와, 예쁘다! 산뜻한 표지 사진에 감탄하던 아내는 당신 이름이 없네~ 금세 어두워진다 내 자랑이 잠시 무안해지는 틈으로 반가움이 서운함과 실망으로 급강하한 맥락을 보니 아무개, 아무개, 하며 예닐곱의 내로라하는 시인들을 열거하고 내 이름은 등(等)자에 숨겨놓았다 등(燈)이 내 별호잖아, 되잖은 농으로 무안함을 달래두고 나는 잠겼다 저 내로라하는 이름들이 영롱한 불꽃 같으니 저 찬란의 주위를 두르는 일 또한 귀하지 않은가, 하여 나는 등 아니라 등피여도 좋겠다 불꽃을 감싸 어둠을 밝히면 등피까지가 등불 아닌가, 궁리하는 내 안에 거짓말처럼 등불 하나 켜져 무안을 자랑으로 말갛게 헹궈놓는 것이었다 ..

오창렬 / 침묵을 몰고 오다

침묵을 몰고 오다 오창렬 저녁이 소를 몰러 갔을 때 골짜기에는 침묵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말뚝에 묶인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풀을 뜯는 동안 초록의 피도 낭자했을 것이나 소란까지 모조리 뜯어먹고 침묵은 소처럼 몸집이 컸다 소를 만나러 다가갔을 때 커다란 침묵 속에서 소는 풍경 소리를 들려주었다 풍경 소리 틈으로 재빨리 손을 집어넣으며 소를 데리고 나올 때 잘하면 침묵을 만져볼 수도 있으리라 저녁은 잠시 설레기도 했으나 침묵을 만지지 못하고 소를 만나지도 못하고 숲이 거대한 짐승으로 변하기 직전에야 저녁은 겨우 고삐를 수습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침묵 한 마리가 마당에 들어서자 집도 우두커니 서서 밤새도록 생각이 깊어졌다 ​― 시집 『그러니까..

금강하구사람 / 시인과 욕심 2

시인과 욕심 2 자연을 닮은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문장을 놓으려고 애쓰는 것도 어쩌면 머리에 잠깐 머문 생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리저리 만지작거릴수록 자연스러워지기는커녕 욕심이 한 겹씩 덧칠되어 처음의 마음을 가려버리기도 합니다. 글을 쓸 때마다 궁금해집니다. 세월을 따라 욕심만 차곡차곡 쌓이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정작 내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참 많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의 아름다움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드러납니다. 오래 바라볼수록 마음이 가는 모양에는..

시인이 그립다 2026.08.19

아기 예수 2

매사에 긍정적으로 보이고,특히 놀이에 적극적이다.집중도가 높다. 5분 정도혼신으로 끙끙 기도를 짜낼 때는 좀 걱정이 된다.문제는, 간식 시간이다. 일단, 먹을 때는 집중도 하락!프로그램을 벗어나 딴 세상을 여행한다.저만의 생각에 빠져든다. 각자도생그럴 때마다 기도로 다스린다. 나름대로 숙연하다.다시 시작! 둘이 짝인데, 팀워크가 좀 그렇다.뭔가 문제가 생겼다가겨우 짝을 찾았다!오늘 맡은 역할은, 무거운 '김' 진 자여!헌금위원 겸직. 어째 건달 패션이다.온몸으로 기도할 때까지는 순진했는데살짝 되바라진 요즘.

금강하구사람 / 신의 일기장

신의 일기장 내 귀에 당도한 소문에 의하면 신이 걸어가면서 찍은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피눈물 흘린 자국이라는데 신의 발자국을 모아 쓴 일기장에는 신의 말씀을 밟는 자마다 걸음걸음 선명하게 놓인 그의 마음을 읽을 것이라 적혔다는데 내가 여태 짚어보지 못한 말씀, 신을 찾아가는 길에서 한 번도 신에 묻혀보지 못한 말씀이라 이러다가 내 신이 다 닳아버릴 때까지 신을 만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터덜터덜 걱정만 한아름 안고 들어간 시골 예배당에서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뒷모습을 보았네 말씀의 거처는 하늘이 아니라 언제나 땅에 있다 하고, 한 발자국씩 그 땅을 디뎌 기록한 말씀이니 신을 벗어야만 만날 수 있다 하니 신의 일기장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하네. 아끼던 신을 벗어던지고..

부스러기 글 2026.08.13

금강하구사람 / 저녁의 표정

저녁의 표정 저녁이 되면 슬슬 배가 고프다. 육신만 허전한 건 아니다. 사냥하러 나가지 않은 마음도 배고프다. 한때는 아침마다 신을 닦고 집을 나섰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 갈 곳이 없어진 뒤로 하루는 이상하게 길어졌다. 비축해 둔 약은 없다. 처방 없는 해묵은 병이라 백약도 길을 잃는다. 가라앉은 낮의 표정부터 먼저 고개를 숙인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옮겨 심은 표정도 금세 시들해진다. 책상 앞에 앉아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흰 종이는 밥 한 끼를 내놓지 않는다. 구석에 누웠다. 무엇 하나 길러낼 마음도 오래전에 접었다. 사실 자리를 바꾼 것도 내 의사는 아니다. 세상이 표정을 바꾼 뒤에 일어난 일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침이면 어딘가로 출근하고 저녁이면 돌아온다. 나는 그 사이에 남겨진 사..

부스러기 글 2026.08.12

이세영 시집 『거기까지가 꽃의 기억입니다』 해설

몸에 새겨진 기억들 기억은 오래 갇히면 옹졸해지고 섣불리 밖으로 떠돌면 허풍이 심해진다. 갇힌 생각으로 문장을 심다 보면 작위의 유혹을 견디기 어렵고, 반대로 외출의 바람기를 통제하지 못하면 시는 걷잡을 수 없이 방향을 잃는다. 그러므로 시는 기억을 가두지도, 그대로 풀어놓지도 않는 데서 시작된다. 시는 기억을 그대로 기록만 하는 문학이 아니다. 시는 기억이 몸에 살림을 차렸다가 다시 언어로 흘러내린 자국이다. 그 흔적과 언어는 서로 다듬으며 모양을 갖춘다. 몸속에서 충분히 발효된 생각이 절제된 언어로 모습을 드러낼 때 비로소 시가 된다. 이세영의 시는 기억이 몸에 머물다 언어로 흘러나오는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과거를 너절하게 설명하거나 감상에 젖은 추억을 복원하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이..

이세영 / 달맞이꽃

달맞이꽃 이세영 신작로 잘 보이는 언덕에쪼그려 앉았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달려 나와예배당 종소리도 보낸 지 오래 기다리다 기다리다톡톡 털고 일어서는데저만치 군복 입은 큰오빠 얼굴이둥실 떠오른다 슬금슬금 돌아서 도망하려다가못난이!이름 한 번으로 붙잡혔다 처음 배운 글 자랑삼아군대 간 오빠에게 편지 쓰면서숨기던 부끄러움이다 언덕에서 피는 꽃은 이렇게마음을 들키고 만다 ― 시집 『거기까지가 꽃의 기억입니다』, 문학의 전당, 2026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밥도 숙제도 눈에 들지 않는다. 예배당 종소리가 지나가고 어둠이 내려와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마음이 그렇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 톡톡 털고 일어서는” 마음은 어떨까. 누구나 “못난이!”의 시..

이세영 / 민달팽이

민달팽이 이세영 화분에서 나왔을까벽을 타고 올랐을까몸 한번 움츠렸다 한껏 늘릴 때마다바닥에 진물로 길을 내던 민달팽이 베란다에 누운 햇볕 끝자락에 멈춘다머뭇머뭇 온 길을 돌아보다가만히 더듬이를 접는다 한여름 고구마밭 뒤집다 들어온 어머니수돗가 양동이 물 두어 번 끼얹고사카린 물만 한 사발 들이켠 채마룻바닥 토막 난 그늘 베고눕던 ― 시집 『거기까지가 꽃의 기억입니다』, 문학의 전당, 2026 비 오는 날이었다. 느리고도 끈질기게 몸을 옮기는 달팽이를 집어 베란다 밖으로 던진 적이 있다. 햇빛 쨍쨍한 날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럴 때마다 나는 상상의 문을 닫는 것이다. 달팽이가 남긴 진물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듬이를 접을 때까지, 내 판단을 확정할 ..

이세영 / 새우젓

새우젓 이세영 찬물에 밥 말아오물오물 목구멍으로 밀어 넘기는어머니 스스로 받은 밥상 달랑 새우젓 한 종지에 얹는 말ㅡ매운 것을 못 먹어야소화시키기엔 새우젓만 한 것이 없지며느리 적부터 눈치 보던 어머니 궁색한 변명이다 마당에서 늙은 유기견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다반쯤 감긴 눈으로 밥그릇을 핥는다개밥그릇에 하루가 매달렸다 어머니의 하루는홀로 차린 한 끼를 짜게 삼키며 저물어간다 ― 시집 『거기까지가 꽃의 기억입니다』, 문학의 전당, 2026 밥 한 그릇에 새우젓 한 종지뿐이라. 적당한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잠깐 옆길로 샜다가 오면 뭔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대문을 열어놓았는지, 대문이 없는 집인지 알 수 없다. 개밥그릇이 있는 걸 보니 순한 개..

이세영 / 어둠의 초대

어둠의 초대 이세영 저녁 먹고 아파트 공원을 돈다 잠깐마을을 찾아오던 체조 교실은 쉬어 가는 주말막걸리 마시고 노래 부르던 사람들은 집으로 가고장군멍군은 접힌 채 정자 기둥에 기대고 있다 404동 벽 그림 ‘꽃길만 걸어요’를 지나는데소나기 한바탕 쏟아지다가 잠잠해진다의자 밑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젖어 있다뒤따르던 공원의 말들이 가라앉는다 민구 엄마가 고양이 사료를 들고 와 부스럭거린다슬금슬금 어둠을 열고 야옹이들이 다가온다몇은 어디론가 돌아가고 몇은 어디선가 돌아온다초대받은 눈동자가 하나둘 불을 켠다 ― 시집 『거기까지가 꽃의 기억입니다』, 문학의 전당, 2026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면 무언가 채워지는 것이 있다. 저녁 산책길은 한 발 한 발..

시인의 말을 나누는 동안

시를 하는 것은무엇을 결정하자는 짓은 아닐 터그저 지난 일부터 오늘까지내 눈에 든 시간에 머무는 것 시를 하는 것이어떤 날은 세상 물정도 모르고 바라보다가또 어떤 날은 내일까지꽃의 마음을 쌓기도 하는 것 그러나 저러나이렇게 시간을 쌓고허무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쓰는 기쁨과 스스로 감동하는 것 외에다른 마음의 변화까지는 기대하지 말 일이다시인의 말을 나누는 동안상처도 치유도 들락거릴 테니

이점순 / 시골 밤

시골 밤 이점순 시골의 밤은멍멍개도 자고꼬꼬닭도 자고아버지 해소 기침도 자는데별들만 소란이다.소리 없이 소란이다. ― 시집 『덤이의 모란』, 문예연구, 2026 덥다. 평상에 누워 하늘 보던 날 생각을 잠깐 했다. 주위는 고요하고 내 생각은 소란해진다. 나이 들수록 더 선명해지는 기억이, 오늘 밤 짧은 시 한 편 놓고 가는 꿈을 꾼다. 시를 읽다 보면 단순히 지난 시간에 머물지 않는다. 어릴 적 숨결이 돌아와 도심 방안에 자리 잡고 소란을 불러온다. 별처럼 반짝이는 낱말 몇 개 붙잡고 고요를 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