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그립다 123

금강하구사람 / 시인과 시 읽기 3

시인과 시 읽기 3   당신은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구사하고 같은 글자를 빌려 씁니다. 또한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습성을 가진 이웃입니다. 더하여,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입니다. 그 마음으로 타인과 관계합니다. 사람들 마음을 가슴으로 품었다가 내놓는 모양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전과 다른 생각을 남기게 됩니다. 받은 시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문장은 얽히고설켜 거기서 빠져나오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읽어내는 역량이 부족한 이유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시인이 겸손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는지요.  시를 읽을 때 시인의 의도를 분석하려고 기를 쓰고 덤비지 않으려고 합니다. 시를..

시인이 그립다 2025.01.09

금강하구사람 / 시인과 옥수수

시인과 옥수수 처음 받아서 입으로 굴려보는 말은 매끄럽지 못하다. 첫 문장을 이렇게 쓴다면 어느새 조급한 마음이 들어와 앉을 것이다. 그때부터 말을 예쁘게 다듬어 보여줘야 하는 의무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첫 글자를 찍기 전에 금언 같은 문장을 앞에 두고 읊조린다. “받은 말을 그대로 오물거리며 껄끄러운 혀의 느낌을 즐기자.”라는 말이다. 닳고 닳아 무미건조하지만, 근원을 알 수 없는 믿음이 싹트기도 한다. 사실 내게 고인 말을 오래 참으며 즙으로 짜내 보일 용기는 없다. 혀에 사탕 한 알 굴리다가도 금방 으깨버리기 일쑤다. 이런 급한 성격은 문장을 보기 좋게 다듬기엔 알맞지 않다. 처음 만난 말을 바로 뱉지 않고 혀에 돌돌 굴려보는 짓이 참 어렵다. 그래도 입에 머금은 순간의 말맛만큼은 ..

시인이 그립다 2023.08.07

금강하구사람 / 시인과 살구

시인과 살구 김제 어딘가에서 가져온 살구다. 부드럽고 달다. 어릴 적 시골집 외양간 옆 살구나무가 내려놓은 그 맛이다. 떨어질 만하니 그 자리에 떨어진 것이다. 떨어진 살구가 맛있다. 살구 몇 개 담긴 접시를 놓고 컴퓨터를 켜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눈에 든 글이 이런 살구 같으면 좋겠는데, 때에 맞게 그 앞에 도달한 글이 이런 맛이 나면 좋겠는데, 오늘처럼 살구 이야기를 쓸 때 입 안에 침이 살짝 고이기라도 한다면 일단 절반의 성공이다. 무엇이든 철없이 따는 열매는 떫다. 알맞게 익었을 때 지상으로 내린 향기를 줍는 이가 진짜 시인이다. 그러니까 서둘러 막대기로 쑤석거려 따낸 열매를 들이미는 건 삼갈 일이다. 오늘은 이만큼만 쓰고 살구나 먹을까 하는데, 갑자기 밖이 어두워진다. 오늘내일 ..

시인이 그립다 2022.06.23

금강하구사람 / 시인과 얼굴

시인과 얼굴 사람들 저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가진 생각도 가지가지다.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고, 막 지어낸 표정으로는 순간의 표현을 읽어낼 수 있다. 어느 시인의 원고를 받은 첫날 예전에 없던 부담감이 들어왔다. 그 나이를 살았어도 시가 아이처럼 예쁘고 때도 묻지 않았다. 발표에 앞서 내게 보여주는 마음이 고맙고, 이런 행운을 누리는 것이 짜릿하면서도 조심스럽다. 뭔가 참견하고 싶은 오지랖이 가끔 올라오지만, 이런 사치 따위는 꾹 누르는 것이 예의로 여긴다. 며칠 담담하게 읽기로 했다. 그가 붙잡은 허공의 말은 오랜 시간 품에 안고 정을 붙인 것이다. 밤새워 다독이기를 열중한 말, 말들을 직접 안아볼 수 있다니. 요즘 세상에 파일로 받지 않고 일일이 교정부호를 넣..

시인이 그립다 2021.05.06

금강하구사람 / 시인과 여백

시인과 여백 당신과 나는 관심 분야가 달라서 이야기할 게 참 많아요. 이런 이유로 살림을 차리고 많은 이야기로 겨울밤을 새우는 사람이 있겠지요. 가까이 온기를 포개면서 견뎌온 날을 돌아보다가 문득 새롭게 찍힌 자국을 발견하기도 하는데요. 작은 방에 놓인 자국을 보니 놀랍게도 생각이 겹치던 낱말뿐이었어요. 분명 각자 다른 이야기를 했는데, 그 말들 다 어디로 갔을까요. 방에 남은 느낌표, 시에 대한 생각이 서로 안고 있는 것을 알았어요. 몸을 웅크린 채 춥지 않게 품었다가 건네주던 마음이 거기 살고 있었어요. 방을 옮기면서, 이전보다 조금은 넓어지고 조금은 따뜻한 겨울밤을 누리고 있어요. 돈이 많아지지도 않았고 식탁에 고기가 놓인 것도 아닌데요. 우리는 여전히 각자 얻어서 만지고 다듬던 생각 한 줌 슬며시..

시인이 그립다 2021.02.08

금강하구사람 / 시인과 조급증 3

시인과 조급증 3 오랜만에 편지를 읽습니다. 오랜만이라는 건 우리 사이에 특별히 사인을 주고받아야 할 일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아니 특별하지는 않더라도 지나는 생각 끝에 잠깐 맺히는 사람도 되지 못한 것이지요 나는. 이게 좀 섭섭하다 이겁니다. 적어도 사계절 안부 한 토막 정도는 던져줘야 시인 아닌가요. 잊혔다가 한 번씩 들어오는 편지에 오늘도 그 말이 가득하군요. 어디서 시를 몇 편 보내라는데, 며칠 만에 겨우 형체를 보이던 시가 하루는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더니 오늘은 나풀나풀 날아가 버렸다.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어찌어찌 그걸 재생하려고 머리를 굴리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게 지끈거린다는 말씀이라. 당신의 하소연을 여기 놓다가 문득, 엄살이나 사치 정도의 낱말을 섞어 답장하려다가 그냥 ㅎㅎ를 실없이 찍..

시인이 그립다 2020.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