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문장의 통로를 지나가고
김헌수
감자를 삶아 먹으며
소리를 굴리는 날이었지
포슬포슬한 글을 보면서 매달린 문장을 쓰고
뜨문뜨문 웃어보는 날이지
어제의 내가 지나가고
가야 할 길을 지나치며
글 바깥에서 그림자를 품어보았지
책상을 끌어당겨 가까이 있는 것들을 봤어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얼룩
여며지는 글과 문장의 속앓이가 따라오는 게 보였어
혀끝에서 쓰고 읽고 지우고 다시 쓰고 읽는
당신은 문장의 통로를 지나가고
새벽에 써놓은 낱말 사이로
별은 뜨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포대자루에 주워 담은,
그 낡은 것들로 하루는 밝아지고
뛰노는 문장을 혀끝으로 녹여보는 날이었지
- 시집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모악, 2020
오물오물 굴린 소리가 언제 거기까지 닿을지 몰라 소리는 굴릴수록 소리의 모양을 찾는데 그 모양의 임자는 어디쯤 오고 있는지 몰라 어쩌면 이렇게 다듬어진 말을 보내느라고 받느라고 사람들은 새벽까지 뜬눈이 되어 사는지 몰라
애초에 가슴에 담으라는 부탁도 없이 그저 어제의 나를 싣고 오늘을 지나치고 살아 내 소리와 소리의 바깥을 당겨 품은 몸은 스스로 얼룩이 지네 띄엄띄엄 놓인 낱말을 수습하다가 별을 잡고 낙엽을 줍고 다시 돌돌 혀로 말다가 젖네
그동안 내가 안았다가 내놓은 문장은 다 어디로 흘렀을까 생각의 자국을 따라 걸으면 저녁 무렵에나 그 집에 닿을까 문장 끝에 슬그머니 묻히는 말이 그래 내 말에는 늘 당신이 지나가지 낱말과 낱말 사이 눈 마주치는 일이 설레고 나는 또 새벽을 앓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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