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고 남은 생각

금강하구사람 / 당신은 문장의 통로를 지나가고(김헌수)

금강하구사람 2020. 10. 22. 14:45

당신은 문장의 통로를 지나가고

 

                                 김헌수

 

 

감자를 삶아 먹으며

소리를 굴리는 날이었지

 

포슬포슬한 글을 보면서 매달린 문장을 쓰고

뜨문뜨문 웃어보는 날이지

어제의 내가 지나가고

가야 할 길을 지나치며

글 바깥에서 그림자를 품어보았지

 

책상을 끌어당겨 가까이 있는 것들을 봤어

안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얼룩

여며지는 글과 문장의 속앓이가 따라오는 게 보였어

혀끝에서 쓰고 읽고 지우고 다시 쓰고 읽는

 

당신은 문장의 통로를 지나가고

새벽에 써놓은 낱말 사이로

별은 뜨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포대자루에 주워 담은,

그 낡은 것들로 하루는 밝아지고

뛰노는 문장을 혀끝으로 녹여보는 날이었지

 

 

           - 시집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모악, 2020

 

 

 

 

  오물오물 굴린 소리가 언제 거기까지 닿을지 몰라 소리는 굴릴수록 소리의 모양을 찾는데 그 모양의 임자는 어디쯤 오고 있는지 몰라 어쩌면 이렇게 다듬어진 말을 보내느라고 받느라고 사람들은 새벽까지 뜬눈이 되어 사는지 몰라

 

  애초에 가슴에 담으라는 부탁도 없이 그저 어제의 나를 싣고 오늘을 지나치고 살아 내 소리와 소리의 바깥을 당겨 품은 몸은 스스로 얼룩이 지네 띄엄띄엄 놓인 낱말을 수습하다가 별을 잡고 낙엽을 줍고 다시 돌돌 혀로 말다가 젖네

 

  그동안 내가 안았다가 내놓은 문장은 다 어디로 흘렀을까 생각의 자국을 따라 걸으면 저녁 무렵에나 그 집에 닿을까 문장 끝에 슬그머니 묻히는 말이 그래 내 말에는 늘 당신이 지나가지 낱말과 낱말 사이 눈 마주치는 일이 설레고 나는 또 새벽을 앓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