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옥수수
처음 받아서 입으로 굴려보는 말은 매끄럽지 못하다. 첫 문장을 이렇게 쓴다면 어느새 조급한 마음이 들어와 앉을 것이다. 그때부터 말을 예쁘게 다듬어 보여줘야 하는 의무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첫 글자를 찍기 전에 금언 같은 문장을 앞에 두고 읊조린다. “받은 말을 그대로 오물거리며 껄끄러운 혀의 느낌을 즐기자.”라는 말이다. 닳고 닳아 무미건조하지만, 근원을 알 수 없는 믿음이 싹트기도 한다.
사실 내게 고인 말을 오래 참으며 즙으로 짜내 보일 용기는 없다. 혀에 사탕 한 알 굴리다가도 금방 으깨버리기 일쑤다. 이런 급한 성격은 문장을 보기 좋게 다듬기엔 알맞지 않다. 처음 만난 말을 바로 뱉지 않고 혀에 돌돌 굴려보는 짓이 참 어렵다. 그래도 입에 머금은 순간의 말맛만큼은 받아적으려고 한다.
말하자면 오늘 탁자에 놓인 옥수수 한 토막이다. 압력밥솥에 삶으면 찰진 맛이 난다거나 소금이었을까 설탕이었을까 뭔가를 넣는다거나 하여 이런 맛이 난다는 아내의 잔소리가 사라진 이후의 맛이 궁금한 것이다.
덩그러니 놓인 옥수수와 대면은 부드럽지 못하다. 한 가닥 옥수수수염이 입술에 붙는다. 떼고 나서 제목을 적고 나니 묘한 기대감이 달라붙는다. 옥수수 알갱이들, 촘촘히 박혀 있는 낱말에 반응하는 내 혀의 감각이 슬슬 입맛을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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