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정진혁
멀리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눈 위에 누군가 토해 놓은 울렁거림을
비둘기가 쪼아 먹는 것을 본다
그 자리가 어찌나 먼지
내가 떠날 수가 없었다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얼어붙은 먹이를 쪼아대는 비둘기의 눈은 왜 그리 먼지
딱딱한 바닥과 부리 부딪히는 소리는 또 왜 그리 먼지
빨간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남이 토해 놓은 걸 주워 먹는 저 비둘기 걸음은 왜 저리 먼지
먼 것은 이기지 못한다
나는 자주 나를 먼 것에 빼앗겼다
국수가락 같은 길에
소화되다 만 오뎅 부스러기 같은 시간에
끈끈한 타액 같은 저 너머에
누군가의 눈을 보며
웃으며 나눈 이야기들이
붉게 뒤섞여 먼 것이 되어 오고 있다
비둘기가 쪼아대는
저 먼 것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멀리 가기 위해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 시집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현대시학, 2014
잠들면 다 잊힐까 하였는데, 그게 아니다. 팔다리가 슬금슬금 간지럽고 내 몸에서 벗겨진 껍질인지 어디서 붙었는지 머리맡에 부슬부슬 흩어져 있다. 형체도 분명하지 않은 부스러기라 원래 모양을 가늠할 수 없다. 냄새도 날아갔으니 성분을 알 수 없다.
어디서 질질 끌고 온 발자국을 더듬어 보지만, 중간에 끊어진 기억의 끈만 덜렁 창문에 걸렸다. 원래 내 안에 살던 것이 밖으로 떠돌다 기어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당신이 보낸 편지에 묻어온 것일까. 이런저런 상상을 띄워도 도무지 출처를 찾을 수 없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을 붙잡고 산다. 누가 보내줬는지 내가 생산했는지도 모르는 낱말을 얹을 뿐이다. 가까이 보이나 아주 먼 것이 있고 아주 먼 곳에서 와서 몸에서 자라는 것이 있다. 잠에서 깬 생각 툭툭 털다 보니 한 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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