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이파리
황구하
유명 시인, 헌책방골목에 나타나셨다
ㅇㅇㅇ 시인께,
유명하지 않은 혹은 유명하기도 한 시인 이름 옆에는
올림 또는 모심, 더러는 낙성관지 붉게 찍힌 시집들 아찔하다
그중 눈에 익은 시인의 시집 한 권 들고
무심코 책갈피 넘기다 보니
벚나무 이파리 한 장, 숨죽인 채 누워 있다
심장 굳어 화석이 된 어느 부족의 시신처럼
별빛으로 달빛으로 시를 읽다가
문득 숨 내린 그 자리, 꽃잎 훌훌 벗어 던지고
텅 빈 허공, 잠시 머물렀을 시인의 눈빛을 생각해본다
시를 뿌리는 이랑에서 자꾸만 바스러지는 손자국과
시를 거둔 책장에서 구석으로 구석으로 내몰리는 눈동자와
시를 버리고 집을 나와 비로소 바람에 얹힌 발소리
붉게 묻어나는 시간을 따라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겠다
벚나무 옹알이 첩첩 내 몸으로 옮겨오듯
그래서 세상 모퉁이 그늘에 달라붙은 주춧돌처럼 우뚝
시는 그렇게도 발견되거나 발굴되기도 하는 거라며
유명 시인, 헌책방에서 고즈넉이 강연을 하고 계시다
흉터로 남겨진 시, 배낭 속에서 울고 있다
- 시집 『화명』, 詩와에세이, 2018
이사하자고 한다. 가져갈 것보다 버릴 게 더 많다. 많이도 쌓았고 많이 허물었다. 그러고도 미련이 남아 헐어낸 책을 한 번 넘기다가, 저자 서명이 눈에 든다. 내 가슴에 박히고 알게 모르게 일어서고 눕던 시인의 말에 멈칫, 미안하다. 헌책방에 가져가는 것도 무책임한 짓이다. 슬그머니 몇 권 다시 거두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이사하자고 한다. 내 생활도 어느 정도 정돈할 기회가 왔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오래 살던 작은 방의 알뜰한 생각, 새벽으로 안고 자던 시의 마음은 버리지 않기로 한다. 다 덜어내고 덜어내도 내 심장을 찔러 넣었던 한 줄 시구는 품고 가려고 한다.
그동안 나는 술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면서 생의 마디마다 심하게 취하던 것이었다. 시 한 줄도 제대로 빚지 못하면서 시집만 끼고 사는 생이었다. 아직은 욕심이 남았는지, 내 시와 시 동무를 밖에 두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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