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노파 파파
강우현
빌딩 앞에 소파가 버려져 있다
사무실 가장 근사한 자리에 앉았던 가죽옷은
시간이 할퀸 자리마다 해졌다
서류를 짓누르는 한숨이 잠깐 쉬던 자리에
너털웃음이 마지막 엉덩이를 붙이고 떠났다
정년이 지난 직원의 자리는 문밖
업무가 없다는 단호한 스티커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행인들을 저지한다
오직 예스맨이던 얼굴에서 입을 지우고 귀를 닫고
진리를 깨우친 듯한 품이 기다림을 놓아준다
밥이 되고 집이 되고 내일이 되던
결재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누군가 앉았다 일어서면 내일이 환해지고
누군가는 손에 땀을 쥐기도 하던 저 노파
지팡이를 짚고 가던 할머니가 엉거주춤 앉자
기운이 달리는 품으로 습관인 듯 사랑인 듯 오래 받아 안는다
횡단보도 너머로 구청 트럭이 보일 때
엄마 얼굴 모르는 조카를 장가보내고 가야 한다시던
팔순 넘은 아버지가 뛰어왔다
- 《우리詩》, 2020년 11월호
감각적인 시선으로 따라 읽다 보면 시인의 노련한 표현을 놓치기도 한다. 이른바 촉감에 반해서 그윽한 눈길을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다. 바람에 날려버리기에 십상인 풍경에 위로의 편지를 보낸 것을 나중에야 발견해서 무안하다. 버려진 것에서 지난 시간을 일으켜 세우는 표정은 얼마나 깊은 생각으로 시를 써야 완성하는 것일까.
시인의 심성이 원래 그런 줄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시를 만지는 사람은 “시간이 할퀸 자리마다” 미련의 눈길이 닿아야 하고, “한숨이 잠깐 쉬던 자리에” 따뜻한 손길이 머물러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낡은 소파에 노파와 파파를 앉히는 상상은 단지 시력詩歷에 의지한 것만은 아니다. 소외된 자리가 눈에 밟히는 시인에게는 정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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