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명
황구하
함께 이루는 생은 얼마나 황홀한가
상주시 부원동 석운도예공방
토끼랑 닭이랑 네 집 내 집 없이 드나드는 앞마당 한쪽
늙은 호박 한 덩이
생을 이어주던 넝쿨넝쿨 다 어디가고
무거운 육신 밤새 내린 하얀 눈 속에 묻혀
노을빛 속살 덜어내는 중이다
검붉은 깃털 윤기 잘잘 흐르는 장닭 다가와
누비 눈으로 감싸인 어깨 부리로 쪼는 순간
덩덩, 북소리가 난다
해진 앙가슴에 달라붙은 토끼 두 마리
고개 갸웃거리며 갉아댈 때
샤샤샥 일렁이는 중심의 물결
생의 소리가 저 늙은 호박에 다 들어앉아 있나
감나무 아래 백구도 어느새 담장을 타고
허공을 향해 컹, 컹, 후렴을 한다
소리가 소리를 키우는 눈부신 고요
- 시집 『화명』, 詩와에세이, 2018
책장 한구석에 놓인 당신의 생각이 눈에 띄는 날은 박제가 된 생각에 한 생각이 겹치는 것이고 나는 오래 잊었던 사람 홀로 춥게 누운 밤을 거두는 듯 곁에 두고 싶은 마음 생기는 것이고 그 속울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나도 한때는 저렇게 웅크리고 있었지 상상이 번지는 통로를 막은 채 늙고 있었지 그러다가 정신이 깨어 부슬부슬 덜어내는 살 이 살을 비벼 당신에게 보내는 것이 내 마음이네 이런 생각이 따라오고 가만히 입술로 쪼아대는 낱말들
그렇게 연필 끝에 매달리다가 지친 몸 지렁이 같은 글줄을 따라가다가 질질 흘려버린 꿈 꿈을 쓰려다가 꿈을 버리기만 한 날이어도 이렇게 영혼의 궁핍을 채우고 비우다가 당신을 만나니 좋아 이 고요에 몇 글자 피우는 게 참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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